물론, 어쩌다 보면 이런 공감이 갈법한 제목을 쓰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시각의 차이로, 내가 지목하는 바는 "관점의 변화" 이다.
자,
다이아몬드나 석유로 돈을 번 사람이 많다.
그러나 또한, 쓰레기로 돈을 번 사람도 많다.
얼마전에 사망한 중국의 대부호였던 여인은 쓰레기로 돈을 벌었다.
반도체의 주재료는 모래이다.
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회의론자로 보지만, 니체는 니힐리즘에서 실존주의 철학을 발전시킨다.
종교가 흔들리고, 우리의 근간이 뽑혀나갈 때. 우리는 새로운 발돋음을 해 낼 수 있다.
그래도 지구가 돌고 있을 때,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의 모든 논리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증명이 나왔을 때, 당연히 우리는 좌절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
우리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완벽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최고가 될 수 있는 수 많은 것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길들여진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테다.
사람과 더 친해질 수 있다면, 더 완벽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면, 잠을 자지 않고 끊임없이 몰두할 수 있다면,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습관화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끝장이다.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인식의 전환은 쓰레기를 다이아몬드 보다 값비싼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반면 절대진리는 크레타인의 거짓말에도 쉽게 무너진다.
자, 이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최근에 한 미친짓이 무엇인가"하고 the girl next door 의 여주인공이 묻는다.
"최근 몇 달 동안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가지고 있던 의견을 버린 적이 없다면 맥박이 뛰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 고 버나드 쇼가 이죽거린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세상이 자신의 생각같지 않다고, 결론에 다달았다고 생각이 드는가?
가지려 하지 말고, 세상을 바꾸려 말고, 결론짓지 말자.
관점을 바꾸는 것이 최선을 다해 벽을 향해 내달리는 것 보다 조금 더 쉽다.
------------------------------
이 글을 쓴 사람이 나라는 것은 맞지만, 내가 이 글에 꼭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호모로지쿠스로, 논리적이지 않은 실험같은 걸 하고싶지 않고, 할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앞으로 의학을 전공 한 후 스스로 뇌 이식 수술을 할 계획이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래머로서 일하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 내가 쓰는 2가지 방법이 있다.
1. 프로그래밍 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다고 최면을 건다.
2. 자신을 힙합뮤지션이라고 최면을 건다.
사실 나는 정말 감각적인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될 자질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씩 남들보다 많이 알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며,
또, 그래도 잘 되지 않을 때에는,
가끔 좌절하곤 하는 것이다.
이 때,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 내가 그것을 정말로 좋아하고,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즐겨온 온갖 잡기(장기, pc게임, 바둑, 당구, 등산, 자전거, 인라인, 일본어 등등)처럼 즐거운 것으로 착각하도록 최면을 거는 것이다.
이것은 꽤 효과가 있어서, 나중에는 자신이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이유를 "재미있길래..." 하고 대답하고 말아 버릴 정도가 되는데, 물론 나처럼 기억력이 지극히 나쁜 사람들에게 통하는 방법긴 하지만, 꽤 쓸만하다.
프로그래밍이 재미있어지면, 자발적으로 계속 코드를 보고 싶어지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고, 쓸데없는 지식을 늘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예전에 정말 재미없었던 OOP, refactoring이나 TDD같은 곳에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되고, 그 재미 때문에 프로그래밍을 조금 더 낫게 하게 된다. 점점 더 재미있어만 지는 것이다.
아, 두번째 방법은, 프로그래밍을 때려치고 힙합 뮤지션이 되고 싶을때 이용하면 된다.
(내가 경력 9년차가 아닌 이유이다 - 통계학자나 일드 오타쿠로 착각했다.)
조엘 스폴스키가 쓴 블로그를 적절히 모아서 편집한 쓸만한 책이다.
에릭싱크의 "Eric Sink on the Business of Software"에서도 많이 언급되었던, 이 책은 역시 읽을 가치가 있었다.
에릭싱크가 많이 이견을 보였던 프로그래머의 영역제한문제도 조엘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진다.
조엘은 뛰어난 프로그래머를 계속해서 열심히 발굴하여 프로그래밍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자고 하고, 에릭은 프로그래머를 구성원의 일부화 해서 직접 전화를 받고 함께 결정하게 해야 한다는 XP(Extreme Programing)의 조류를 탄다.
조엘은 뛰어난 프로그래머 + 뛰어난 관리자로서 자신을 out lier라고 하지만 "개밥먹기" 같은 부분에서 직접 자신의 프로그램을 체험해 보라고 권고하기도 한다.
어쨌건 별 생각이 없이 읽어도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 고전(?)인지 쉽게 알 수 있고, 프로그래머라면, (사실은 관리자가 더욱) 당연히 읽어 보아야 하는 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음, 종교논쟁에 대해서 자기만 하고싶은 말 다 하는 약간 얄상궂은 모습을 보이도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만 하다.
아, 또한 로버트 버튼의 The Anatomy of Melancholy 라는 고전적인 심리학 책에서 가져온 표지그림도 꽤 멋지다.
--------------
당연히 "종교논쟁"은 linux-windows나 c-vb-java등의 종교논쟁을 말한다.
아마 생각의 시작은 designer와 programer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왜 디자이너가 프로그래머가 사용하는 편한(?) 방법을 배워서는 안될까?
혹은 왜 프로그래머가 디자인에 대해서 문외한이 되어야만 할까?
최근에 내가 놀란 것은 너나 할것없이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를 나누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포토샵이나 플래쉬를 켜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디자이너에게 vi를 이용한 css코딩 방법을 설명하면, 디자이너에게 왜 그런 것이 필요하냐고 한 마디씩을 한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작 100년을 살아가지 못하는 관계로, 지구가 빙하기와 간빙기를 왔다갔다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사실은 우리는 "간빙기"를 살아가고 있다. 단어가 품고 있는 뜻 그대로, 빙하기가 훨씬 더 길고, 간빙기는 짧다. 빙하기는 안정적이고, 간빙기는 역동적이다.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축의 시대는 짧고, 그 시대를 묻힌 시대는 길다. 암흑기는 길고 혁명의 시대는 짧다.
순서를 바꿔서 산업혁명은 짧고, 기계화된 시대는 길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 등의 pc혁명(?)은 짧고, MS에 가려져 정체된 시간은 길었다. 인터넷 혁명은 짧고, 몇몇의 인터넷 기업들이 장악하는 시대는 길게 가고있다.
물론 눈치를 챘겠지만, 이 짧아져가는 웨이브의 흐름에 끼워넣고 싶은 것이 있다. 나중에 뭐라고 불리울지는 모르겠지만, 점차 빙하기가 되어가는 세계의 경제 흐름속에, 인터넷의 안정화 속에 프로그래밍 언어와 방법론 속에 당연히 새롭게 태어나는 웨이브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모바일을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다.)
자, 사실은 난 그 웨이브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요구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지금 우리의 발 밑을 흔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예전에 안정적이었던 것의 붕괴에서 볼 수 있으며,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것밖에는 말할 수 없다)
일단, 나는 그것을 병합이라고 부르는데, 요즘 말하는 일종의 영역 파괴 현상이다. 고전적인(?) 산업사회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나누지만, 근래에는 컨슈머가 등장하고, 글을 쓰는 사람과 독자를 나누던 것이 개인미디어가 등장한다. 남자같은 여자가 등장하고, 여자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각각의 역할이 불분명해 진다고도, 바뀐다고도 말하지만, 난 "병합한다"고 표현한다.
사실 너무 눈에 띄게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게 고착화의 전 단계인지 아니면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혼돈기는 뭔가 극적인 변화를 몰고오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결국 고착화된 세상에 적응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사람들이 프로그래머에게 원하는 것은 멀티플래이어이다. 대인관계도 좋고 배에 6pack을 달고 다니고, User Interface를 이해하며,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프로그래머를 원하고 있다.
물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수비에 날카로운 연결, 골감각 까지 있는 축구선수들이 필요하고, 아름다운 미모에 Ph.D에 바하를 즐기는 여성들과 꽃미남에 탄탄한 근육에 MBA에 요리를 잘하는 남성이 늘어간다.
"예전에는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가수였는데..."
미안하지만, 순수혈통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 프로그래밍만 잘하면? 디자인만 끝내주게 하면? 대인관계만 좋으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꿈꾸며 한 가지에 뛰어난 사람을 아직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간빙기이다. 엔트로피가 끊임없이 상승하는 혼돈의 시대이며, 변화의 시대이다. 그리고 병합의 시대이다.
이미 디자이너들이 컴퓨터를 사용해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왜 매크로를 활용해서는 안되는가? 이미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form을 만드는데, 왜 사용성 좋게 만들어선 안되는가? (안된다기 보다는 "할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긴 하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산을 내려오면서, 여전히 수도원에서 약초를 심는 승려를 지나치며 이렇게 말한다.
"아직 저 사람은 저들의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보군."
물론 간빙기는 잠깐이다. 모든 것은 당연히 안정화된 상태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간빙기와 다음 간빙기에는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간다. 적응된, upgrade된 모습으로 다음 간빙기에 또 다른 경쟁을(혹은 적응을) 시작한다.
=======================
사실 빙하기는 항상 cadidate 상태 였던 Frozen Storm의 main theme이었다.
에~ 물론, 올해 색상이 Dark였기에 내년에도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광량이나, 빛에 대한 고어에서 나온 말을 쓸 때,
보통 lux(조명도)나
luna(달의 여신),
luster(광택),
luciferase(발광체 내에 있는 단백질성 물질),
luciferin(발광물질),
luxury(호화로운?)
루나틱(lunatic=미친),
루시퍼(lucifer=샛별,악마), 등등.
처럼 쓰는 단어들은 사실 빛에 대한 외경심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게 광명은 두려움을 없애 주지만, 너무 파괴적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이런 감각은 물론, 굉장히 고대로 부터 내려온 것이어서,
여전히 인간이 광명을 두려워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추길 바라마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긴 한다.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을 가진 lucifer라는 단어는 사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매력적인 울림이 있는 단어여서,
(게다가 맑은 새벽에 보이는 금성을 누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성경에서... 라기보다는 아마 영화같은 데에서 먼저 봤겠지만, 어쨌건 악마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기 훨씬 전부터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버린 것이다.
이건 정말인게, 장로회의 공책처럼 생긴 어린이용 성서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고, 에덴에서 꼬셔낸 뱀의 이름도 세이튼(satan)이었고, 중학교 내내 최대 영어 점수는 60점 이었기에(물론 중학교 영어에 나올 리 만무하지만, 영어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요는) 저처럼 멋진 이름이 악마의 이름으로 붙여졌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어쨌건 그런 인연으로, 목사님 큰아버지를 둔 나는 lucifer의 luxury한 이름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루시퍼는 "빛을 가져오는 자"로 불리고, 인간에게 광명을 가져다준 신으로도 보이고, 적절히 섞이다보니, 사실 satan이라는 악마가 lucifer라는 설도 생겼다.
말 안해도 짐작하겠지만,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게 해서 광명(지혜)을 만나게 해 준 것으로 창세기인가에서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분명 lucifer가 한 말이 아닐텐데 , 인간은 왜 이리도 자신들에게 빛을 가져다 준다는 이를 싫어하는 것일까?
1. 진리는 루시퍼가 의미하는 빛과 지혜와는 틀려서.
2. 자유롭기 보다는 놀고먹은 에덴이 더 나아 보이니까.
3. 처음 내가 주장했듯이, 불과 빛에대한 외경 때문에.
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질문이 나온 곳에서 답을 찾아 보자면, 루시퍼는 결국 끝이 없는 어둠의 감옥(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뭐, 꼭 무저갱이 빛이 없는 감옥인지 모르겠지만, 프로그래머의 감각으로 보면, 무한히 반복되어서 빠져나올 수 없는 loop같은 방법으로 루시퍼를 가둔 것 같은데,
프로그래머로서 살아가다 보면, 혹은 그렇지 않아도 좀 살다보면, 자신의 지식이 끊임없이 더 많은 지식을 원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loop에 가두게 만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1번처럼 진리는 다른데 있는데, 지식에 대한 욕구 때문에 끊임없이 지옥에 빠져드는 느낌이랄까...
(아, 반드시 불완전성 원리(-괴델)는 봐야만 한다.)
2번은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사상과 흡사한 측면에 찾으면 될 것이다. 금강경을 보면, 어떤 높은 경지의 지식과 어떤 수 많은 보석들도, 수천 수만 배 많은 지식과 보석으로 의미가 없어지고, 오직 진리를 찿는 것이 나은 방법인데, 이를 넘어서서 극락을 만든 이가 바로 아미타불이다. 세상의 지식과 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마야라면, 미혹된 삶을 버린 극락의 세계인 아미타의 영토는 그 욕심을 버릴 때에 닿을 수 있다.
물론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이는 3번이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인데, 여전히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고, 여러가지 과학을 이용(?)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극장에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으니 참고하면 되겠다.
인간은 지식과 지혜를 불과 빛처럼 좇으며 두려워 하고 있다.
============================
왜 내가 큰아버지 보면 큰일날 고백을 하고 있는가?
내 이름은 사실(?) 명환이라고 쓰는데, 명(明)은 빛을, 환(桓)은 한국에서는 신을 뜻한다. 단지 나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에게 그럴듯한 의미(혹은 이유)를 부여해 보는 것이다.